2008. 7. 25. 08:50
원래, 일본은 전통적으로 라이벌끼리 10번기 이상가는 대전을 만들곤 했었지요

슈샤쿠만 해도 라이벌과 33번기를 햇을 정도거든요
(슈샤쿠가는 라이벌과 초반에는 승율이 나쁘다가 33번기 후반에 따라 잡았음)

당시 최고라이벌끼리 승부를 붙여서, 명인을 만드는거지요.
그시절 명인은 타이틀명이 아니라
바둑가문끼리 붙여서 최고자를 명인이란 명칭을 주는 겁니다.
(본인방도 바둑가문중 하나입니다.)

본인방가문이 유명한거 본인방가문에서 최고로 많은 명인을 유지시켰고, 거의 독점하다 싶이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게 근대까지 올라오면서, 마지막 명인,본인방인 슈사이명인이 명인과 본인방을 타이틀전으로 내어놓고, 그다음부터는 타이틀전이 됩니다.

1933년에 신포석열풍이 휩쓸고 있을때, 요미우리신문사가 일본위기선수권자 선번 대국을 이벤트로 열었지요. 우승자는 오청원이었습니다.
당시 오청원은 5단이었고
원래대로 한다면 치수가 2점이상해야 하지만, 이벤트격 이라서 선번으로 대국하게 됩니다.
(솔직히 2점깔고는 슈사이가 절대 못이기죠)
 오청원이 3.3,화점,천원 착점해서 상당히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일본바둑계의 반항처럼 여겨졌었지요.


본인방가의 포석교리에 어긋한 포석이었기에,
연인에 대한,일본바둑 전통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드리게 되어버리지요.

아무튼 그 결과 슈샤이명인이 2집승 합니다.

봉수제를 책택안해서, 무조건 그날 차레는 백차레에서 중단이 되었고, 명인측에서는 충분히 연구하고 다시 두고 그런 불리한 대국이었지요.
단적인 예로 8일째 대국에 백이 미리 생각해둔 점이 두자, 오청원이 2분만에 두니
3시간반 장수하더니, 한수도 안두고 다음날로 연기... ㅡㅡㅋ

아무튼 160수에 백의 묘수가 나와서, 슈사이 명인이 14일에 걸쳐진 대국은 백2집승 했습니다.


십년쯤 뒤에 160수에 묘수를 본인방문화생이 생각한 묘수라고 세고에 선생이 말을 했다가, 이사장 퇴임까지 하게되는 원인이 됩니다.


아무튼... 그런 내역이 있지만, 그당시 오청원은 기타니와 십번기를 두고 있었습니다.
치수고치기 십번기가 아닌 그냥 십번기 였습니다.


기타니 십번기 내용은 다음글에~~

Posted by 카미유클로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