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5. 08:57
1949년 6얼에 후지사와 구라노스케 8단이 정기대회 성적에 따라 9단으로 승단 합니다.
(후지사와 호사이 와 후지사와 구라노스케는 동일인물입니다. 개명한 이름입니다.)

일본기원 최초로 승단대회를 통한 9단이었고
슈사이 명인이후 없었던 9단이 나오게 됩니다.

9단이라 함은 당대 1인자 일텐데,
십번기를 통해서 이미 당대1인자 자리는 오청원일진데
9단이 있는데 8단이 당대 1인자라는 대우를 받을수도 없는지라
승단을 위한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런데, 오청원은 승단대회를 나가지 않았고, 8단으로 그냥 방치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 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게 신진소장 고단자 10명을 모아 '오청원 대 6,7단 선발 십번기' 를 기획합니다.
말하자면 십번기를 오청원의 9단승단 시험바둑으로 삼은겁니다.

그러나 오청원은 '상수가 하수를 시험하는 일은 많지만, 하수가 상수를 시험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고 거부를 합니다.

요미우리 담당기자가 9단이 되어야 후지사와 9단과의 십번기를 기획할수 있다 라는 설득을 받아
결국 이번 십번기가 이루어 집니다.

7단은 선상선, 6단은 정선 으로 해서
8번의 대국은 백, 2번의 대국은 흑을 쥐고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다까가와,마에다 7단만이 오청원이 흑을 잡게 추첨됬습니다.
(다까가와는 마지막 십번기를 하게 됩니다. 마에다는 슈사이과의 대국에서 결정적인 훈수를 한 인물입니다.)

10명의 7,6단진중에는
다까가와 다꾸,사카다에이오 도 있었습니다.

이번 십번기는 치수고치기가 아니라, 오청원 승단목적을 가지고 있는 십번기 였습니다.

8승 1패 1빅 으로 좋은 성적이라
50년 2월15일에 9단승단을 합니다.


이후, 요미우리는 '오청원 대 후지사와' 를 실현시킬려고 즉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9단이 2명있따는 자체가 1명의 1인자를 위한 승부바둑을 초특급 이벤트 기획입니다.

그러나, 교섭은 난항이 되고, 계속 늦어지자, 하시모도 2차 십번기를 기획을 하게 됩니다.


Posted by 카미유클로델